생각

정글을 시작하며

정글러 2021. 11. 9. 14:08

개인 트레이더로 4년을 살았다. 졸업할 때가 다가오자 어느정도 실력도 쌓이고, 막 수익이 쌓이진 않아도 따로 구직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을 정도의 수입이 나오더라. 자유로운 삶을 좋아해서 큰 고민 없이 미필 무직 상태로 졸업장을 받았다. 2020년 2월, 군필이 아니면 여행을 못가는 나이가 되자 입대를 했다. 그런데 훈련소에 갔다오니 세상이 뒤집어져있었다.

 

번지점프대에서 낙하 후 겨우 2할쯤 회복한 차트들을 군대 안에서 보면서 생각을 했다. 분산투자고 뭐고 모든 종목 모든 상품이 평등하게 폭락하던 패닉장에서, 내가 만약 타이밍 좋게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현금이 아니라 평소처럼 레버리지를 당겨서 포지션들을 들고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작살이 나고, 돈이 돈을 낳는 시스템에서 돈이 사라졌으니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냥 백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확 들더라.

계좌로 맞아가며 학습한 분산투자의 원칙을 요 1, 2년 트레이딩에는 잘 지켰을지 몰라도, 내 인생이라는 투자에는 전혀 지키지 않고 있었다. 내 돈은 100%의 일을 하지만 내 몸 내 능력은 1%의 일도 하지 않는, 자본주의 몰빵 나태 테크였다.

 

한번 눈이 뜨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를대로 올라 이제 지겹게 횡보하거나 내리꽂을 시장에서, 하늘길이 막혀서 모티베이션도 리프레시도 없는 내가 지금까지처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자유로운 삶을 좋아해서 트레이더를 택했지만 결국 모니터 앞에 앉아 고민한 시간이 소득에 비례하는데, 친구들 사는걸 보니 개발자도 크게 다른건 없던데 이쪽도 매력있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 5년 10년뒤의 미래긴 하지만 그래도 하고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위해 하나라도 더 능력을 가지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라는 곳이 워낙 잡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기계공학과 복전을 한 것도, 트레이딩을 시작한 것도 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였다. 석사를 따고 박사를 따서 인류 지식의 최전선에서 연구를 하는 것도 가치있는 삶이겠지만, 내겐 별로 끌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고, 즐기는 분야에서 어썸한 것을 만들어 세상에 즐거운 것을 뿌리고 싶다. 그럴 역량을 갖기 위한 복수전공이었고, 그럴 개인시간과 경제력을 갖기 위한 트레이딩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코시국에 직업을 갖는다면 선택지는 개발자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공학의 영역에 있던 "발명"이 통째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간 시대다. 네이버 카카오가 기적의 펌핑을 하는건 내 눈으로 직접 질리도록 봤고, 요즘 기업에 들어가는 친구와 선배들은 전공이 뭐든 다들 그쪽 직무로 빨려들어갔다. 얘는 전공이 전전인데 대체 왜 크래프톤에서 ML을 하고있을까, 이형은 생명관데 왜 여깄어 하는 느낌. 세상 잘난 사람들 다 저기서 멋진걸 만드는 것 같은데 나도 저기 한번 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혼자 공부를 해서 코딩테스트를 뚫는 것으로도 언젠가 취직은 가능했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그걸 못한다고 하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엄살이고 메타인지를 못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이 이미 먼저 갔던 길이기 때문에, 나도 적절한 인풋을 넣으면 기대하는 결과가 나올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문짝을 뚫고 들어가면, 5년 10년 경력이 쌓이고 나서, 내 능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할때, 나는 전공자와 같은 수준의 눈높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일단 취업의 문짝을 열고 나면 다시는 그런거 준비할 시간 없을거라던데, 카이스트 전산학부 수준의 전공지식을 갖추는 게 멀리 봤을 때 좋았다.

 

그래서 솔직히 후회했다. 어차피 방구석에서 트레이딩하다가 군대 갈건데 왜 성급하게 쓸모도 없는 졸업장을 받아버렸나, 졸업만 안했어도 그냥 바로 3수전공 신청해서 전산과 전필과목 줄줄이 들으면 되는데...

이미 졸업장을 받아버린 몸으로 대체 어딜 가서 그만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게 나혼자 독학한다고 될까 하는 막연함이 있었다.

 

그런데 한 전산과 졸업자 친구가 알려주길 요번에 이런게 생겼단다. 뭔가 부트캠프같은 무언가인데 운영진에 전산학부장님이랑 크래프톤 의장님이 있었다. 커리큘럼도 그냥 전산과 전필과목 스켈레톤에서도 척추뼈만 야무지게 모아둔 구성이었다.(고 하더라 난 전산과가 아니라 잘 모름)

주6일로 매일 10시간 이상의 공부. 대학교 학점으로 치자면 최소 60학점급의 스케줄을 5개월동안 진행한다.

일단 시간적으로만 보자면 각이 나온다. 전산학부 학생이 3년동안 학기당 전공 9학점씩 넣고 캠퍼스라이프를 즐기며 배울 내용을 슈퍼압축몰입해서 6개월만에 배우게 하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6개월이 "짧은 시간"이라 제대로 다 못 배울지, 아니면 밀도의 이점을 살려 전산학부 3년치의 전필지식을 6개월만에 잘 흡수할지는 내게 달렸구나. 이거 한번 도전해보자.

 

그렇게 참가를 결심했고, 3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3기 모집요강이 나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아직 군인이지만, 코로나때문에 휴가를 하도 못나간 덕분에 입학시험 전날부터 전역일까지 말년휴가를 줄드랍하고 사회에 제때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운이 좋았다.

 

정글을 시작하고 1주차가 된 지금, 아직까진 위에서 말한 그 확신이 남아있다. 시간적으로도 난이도 면에서도 굉장히 하드한 일정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길인데 내가 포기만 안한다면 바라는대로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 아직 아는 건 없지만 모르는 걸 알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믿음. 적어도 알고리즘 단계까진 남아있을 것 같다. OS 시작하면 그때는 없을지도?

 

내가 정글 간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고 하도 광고를 해서 그런가, 요즘 주변에 정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학과 1학년때 선택만 하면 갈 수 있던 길을 못봐서 후회하는 블랙카우가 나 말고도 좀 있는 것 같다. 회사나 대학원에 소속되지 않은 몸인데다가 갓 전역한 군인이라 조금 먼저 정글에 왔는데, 선발대로서 좋은 선례를 만들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정글이 고려할만한 선택지가 됐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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